가여운 것들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작가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장편소설 『가여운 것들』이 황금가지에서 출간되었다. 20여 년의 집필 끝에 완성된 첫 출간작 『라나크』로 단테, 조이스, 오웰, 카프카 같은 문학계 거장들에 비견되며 스코틀랜드 문학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의 반열에 오른 그레이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언론과 평단의 찬사를 얻으며 휘트브레드상과 가디언 픽션상을 수상하였고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어느 빅토리아
서문부터 마지막 주석까지 단 한 글자도 놓쳐서는 안 되는 이 작품은, 작가 '앨러스데어 그레이'가 가히 '천재'임을 증명한다.
어떻게 이런 치밀한 구조 속에 이토록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배치할 수 있었는지 경탄할 따름이다.
1. 전율을 부르는 3중 액자식 구조
이 소설의 정수는 3중 액자식 구조에 있다.
편집자 '그레이'가 '맥켄들리스'의 원고를 발견하는 서문 파트를 지나, 우리는 '맥켄들리스'가 창조한 기괴한 소설 속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하지만 이 소설의 진짜 묘미는 그다음이다. 앞선 모든 허구를 정교하게 박살 내는 '빅토리아'의 편지,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편집자 '그레이'의 주석은 완벽에 가까운 짜임새를 보여준다.
자신의 남편이 쓴 소설을 가당치 않다는 듯 현실의 논리로 해체해 버리는 '빅토리아'의 목소리,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런 주체적인 '빅토리아'의 삶조차 소설 제목 그대로 "가여운 것"으로 회귀시켜 버리는 마지막 주석의 힘은 이 소설을 '신'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2. 마음을 흔드는 매혹적인 캐릭터들
어떻게 한 작품 안에서 모든 캐릭터가 이토록 입체적이고 매력적일 수 있을까. 등장인물 모두에게 깊이 공감하게 되며, 이는 곧 강렬한 몰입감으로 이어진다.
- '고드윈 백스터': '맥켄들리스'의 소설 속에서는 기괴한 외형을 가진 괴짜 의사로 묘사되지만, '빅토리아'의 편지에서 드러나는 그의 진짜 성품에 깊이 감명받았다. 어린 시절 적절한 사랑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결하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깊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 '아치볼드 맥켄들리스': 잘난 와이프의 거대한 그늘 아래서 평생 열등감에 짓눌려 살아야 했던 인물이다. 그의 찌질하면서도 처절한 감정선은 지독하리만큼 현실적이라 읽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특히 마지막 주석에서, 아내('빅토리아')가 그를 조금만 더 사랑했더라면 그의 원고 속 해부학적 오류들을 고쳐주었을 것이라는 대목은 '맥켄들리스'라는 인간의 비극을 완성하는 듯해 무척 안타까웠다.
- '빅토리아'('벨'): 억압된 시대를 뚫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그녀의 강인함에는 무조건적인 응원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주체적이었던 그녀조차 전쟁에서 세 아들을 잃고 학계에서 외면당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을 느꼈다. 그녀의 빛나는 삶조차 결국 시대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희생양이 되어버린 듯해 마음이 무겁다.
3. 신의 한 수: '이운경' 번역가의 탁월한 주석
특히 이번에 읽은 국내 번역본은 그야말로 발군이다.
'이운경' 번역가님의 주석은 원작의 가치를 한층 드높이는 독보적인 수준이다. 작가가 곳곳에 숨겨둔 방대한 근현대사 지식과 은유들을 완벽하게 보조하며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원작자가 의도한 '가짜 주석'의 뉘앙스를 절묘하게 살리면서도, 영어 특유의 미세한 함의를 우리말로 유려하게 전달한다. 독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세심하게 짚어주는 번역가의 실제 주석들이 원작과 교차하며 지적 호기심을 극한으로 자극한다. 이 정교한 번역 덕분에 서문부터 마지막 주석까지 단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마무리
《가여운 것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토씨 하나 놓쳐서는 안 되는 완벽한 우주다. 최근 영화로도 제작되었다는데, 소설이 선사한 이 압도적인 캐릭터들과 철학적 메시지를 스크린에서는 어떻게 구현했을지 몹시 기대된다.
이 전율을 아직 느끼지 못한 이들이 부러울 정도로, 단연코 추천하는 작품이다.